<적멸굴 가는 길에 멀리 화엄벌이 보인다>

천성산 화엄벌, 원효대사가 1000명의 사부대중에게 화엄경을 설법하여 득도케한 곳으로 유명하다. 천성산 고산 평원이 하나의 법당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원효대사는 어디서 어떻게 득도했을까?

<UBC 울산방송>은 지난 2월자 뉴스 리포트를 통해 원효대사가 양산 천성산 적멸굴에서 득도했으며 의상대사도 적멸굴에서 수도하고 홀로 양산 가야진사를 통해 당나라 유학을 떠났다는 새로운 주장을 제기했다.  

지금의 경기도 화성, 즉 당항성에서 뱃길을 통해 당나라 유학을 시도했다는 학계의 정설과 상반되는 주장이다. 원효대사의 해골물 이야기도 전설일 뿐이다. 686년 원효가 입적한 후 약 300년이 지난 후인 998년 송나라 사람 찬녕이 쓴 <송고승전>에 '당주계' 기록을 토대로 유추하는 것일 뿐이다. 송나라의 입장에서 해동국을 속국으로 여기고 우리의 포구를 당주계라고 쓴 것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당주계에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원효대사의 유학길 추정 경로>

원효 연구가 고영섭 교수가 쓴 <원효탐색>에 따르면 원효는 650년(34세)에 의상과 함께 입당을 꾀하다가 요동땅에서 고구려 수비군에게 발각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탈출한다. 11년후(45세)때 의상과 함께 2차 유학을 시도했으나 득도하여 신라로 되돌아 오고 의상은 입당하여 화엄종 2조인 지엄화상의 문하에 들어간다.

원효가 2차 유학을 시도할 당시인 661년의 국제정세는 660년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이듬해이며 고구려와 전쟁이 한창인 시기였다. 당항성은 백제의 잔존 세력들과 고구려와 국경 부근이기 때문에 승려 원효가 떠나기에 어려운 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안전한 가야진을 통해 가지 않았을까?

 

울산방송은 동학의 거두 최제우 선생도 이곳에서 수도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적멸굴에 다다르기 50m근방에 대나무 숲이 있다. 또 굴 바로 아래에 100 ㎡ 가량의 너른 평지가 있다.

1856년 내원사에서 49일간 기도하고 이듬해  이곳 적멸굴에서 49일간 수도한다. 이 때에 입구에서 인내천(人乃天)의 사상을 강론하고 백성들에게 양반 상놈할 것 없이 평등한 세상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을까? <하북면지>는 '적미굴과 최제우' 제하의 전설을 전하고 있다. 적멸굴 내부의 그을음도 이 곳에서 사람이 거주하며 밥을 해먹은 증거라는 것이다.  

<적멸굴 바로 아래에 대나무 숲이 있다. 별안간 대나무 숲이 보이는데 사람이 거주했음을 나타낸다. 이 곳 너른 땅에 누가 모여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불교용어 사전에서 '적멸'은 미혹과 생사의 인과를 떠난 경계로 열반과 해탈을 뜻하는 단어다. 적멸굴은 곧 열반과 해탈이 이뤄진 장소다. 원효대사의 해골물 이야기는 단순히 세상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이곳 적멸굴이 마치 사람의 해골, 두개골 뼈를 묘하게 닮아 해골물 이야기가 이곳 적멸굴을 토대로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케 한다. 적멸굴 내부에서는 적멸수, 즉 석간수를 해골물로 본다면 원효대사의 해골물 이야기가 이 곳에서 만들어 졌음을 유추케 하는 대목이다.

 

<큰 바위아래에 적멸굴이 보인다. 붉을 적자를 써서 붉은 동굴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 곳 적멸굴이 영엄한 기가 흐르는 곳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원효가 이곳에서 득도했거나 또는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이곳에서 득도했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지면 양산이 득도의 도시로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상사의 획을 그은 원효대사, 그리고 최제우, 두 훌륭한 사상가의 득도는 천성산의 도움이 없었으면 어림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적멸굴 안에 석간수.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수도하여 이 물을 먹고 득도하지 않았을까 추정할 뿐이다. >

 

 

 

 

 

 

Posted by 꼬장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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