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마을 습격 피해 …토벌작전 등 치러

국군에 의한 민간인 집단학살 천여명 추정 '참혹'


<1950년 7월 14일, 양산농업중학교 학도병들이 출정에 앞서 기념사진을 찍고있다. 사진은 양산시전몰군경전사록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6.25전몰군경 전사록에서 발췌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이 어김없이 돌아왔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도 올해로 64주년을 맞았다. 양산지역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낙동강방어선 내부에 위치해 공산세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전쟁 전 미군정 시기의 한반도 내부에는 전국 요소 마다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지식인들이 포진해 있었고 여운형 선생은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해 조민인민공화국이라는 새로운 이념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미군이 주둔하면서 우리땅 한반도는 이념전쟁의 치열한 각축전이 된다. 한국전쟁은 그 미소 양국의 대리전 성격이 강하다. 6.25전쟁부터 휴전되기까지 지역 일대 빨치산들의 마을 및 경찰지서 습격은 수차례 진행돼 소규모 교전과 토벌작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한 첫 투표가 진행된 5월 10일 빨치산에 의한 동면 유지 김석철의 희생이 지역내에 최초로 보고된 공산세력의 만행이다. 이후에도 6.25전쟁 직후까지 42명의 양민이 공비들에게 희생당했다. 이후에도 양산 선리지서가 1949년 8월 28일 새벽 불의의 기습을 당해 1시간 가량 교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육군 제23연대 김종원 연대장이 휘하 부대를 이끌고 작전에 참가하면서 경찰 병력으로 역부족인 공비토벌작전에 전세가 기울기 시작한다. 김 연대장은 1949년 1월 화제리 박덕수(경남 동부지역 야산대 총사령관)를 검거 사살한 민간인 박상수 등 2명에게 양산초등학교 교정에서 포상하고, 박상수는 현역 소위로 임관시키기도 했다. 공비들은 이에 화제리 외화마을에 방화를 일으켜 보복해오기도 했다.  

이후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차단된 인민군 잔여병력은 신불산 심동대굴과 파래소 폭포 아지트에 숨어들었다. 이때 미 제10군단 직속부대 였던 한국군 특수부대가 미군 수송기로 부산해 작전지에 투입, 심동대굴은 비행기 폭격, 파래소 아지트는 레이팜탄을 투하해 소탕했다고 마을 사람들이 전하고 있다. 양산향토사연구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1946년 이후부터 1853년까지 양산지역에서 사살된 공비의 수는 대략 70여명으로 추산된다. 울산 울주군과 신불산참전유공자회는 지난 2012년 <신불산전사>를 발간해 신불산 공비소탕작전을 기리고 있다. 

한편, 진실과 화해를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양산지역에서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국가 공권력에 의해 집단학살된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만 97명에 달하며 춘추원 합동묘 앞에 희생자 600여명의 이름을 새긴 비석이 있었으나 5.16군사쿠데타로 비석이 훼손됐다는 증언, 각종 신문기사 자료를 참고했을때 희생자는 1000여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은 최근 SNS를 통해 확산되고 있는 <보도연맹 양민학살> 사진이다. 한국군 헌병들이 총살 집행에 앞서 포승줄로 양민들을 결박하고 있다. 미 국무부에서 최근 기밀 해제된 것으로 알려진 이 사진의 촬영 장소, 일시는 확인되지 않았다.


 



Posted by 꼬장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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