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 가례면 시골집에서 연이틀을 보낸다. 화단 돌덩이 옆에 국화가 수줍게 돌아 앉아 서리를 맞고 있다. 의령집에 가면 돌아가신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 같다. 집 안 천장에 대들보는 아버지의 갈비뼈 같고 뒷마당에 가죽나무에서는 아버지가 잠을 덜 깬 채 새순을 뜯어 드시던 모습이 보인다. 

어머니와 텃밭에서 고구마를 캤다. 고구마 줄기를 들어올려 툭툭 뽑아 올리는데 뿌리에 굵은 놈 하나 달려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노루가 잎파리를 뜯어 먹어서 뿌리가 크지 못한 것이라고 얘기해 주셨다. 수확의 결실을 이루기 위해서는 노루도 쫒아야 하고, 땅도 배수가 잘 돼야 하는 조건이 맞아 떨어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집 텃밭을 망친 그 노루가 나는 밉지 않다. 어머니와 나는 엄지손가락 만한 자잘한 고구마 몇뿌리만으로도 즐겁게 식사할 수 있다. 

창가가 잘보이는 식탁에서 거름종이에 마트에서 산 맥심 분쇄 커피를 내려 마신다. 손으로 향을 더듬는데 분쇄하기 전의 이디오피아 이가체프 커피의 산미보다 못하고 향도 못하다. 어머니와 창밖을 내다보며 아버지에 대해 얘기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나를 있게한 분이고 이 집을 지은 분이다. 나는 어머니 앞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불평하다가 이내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햇살 좋지만 골짜기 바람이 맹렬히 부는 한가한 토요일에 라디오로 서양 클래식을 틀어 놓고 오후 3시의 햇볕을 집 처마 아래에서 즐겼다. 아침에는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요리조리 찾아 다니며 햇볕에서 황동규 시인의 시집 <꽃의고요>를 읽었다. 시는 새벽잠을 깨고 읽을 때 머릿속에 잘 들어오는데 아침에 시를 읽어도 나쁘지 않았다. 이 시집에서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카잔스키의 묘지를 가서 쓴 시와 시 속의 한 구절 '자유란 참을수 없는 삐딱함이다'라는 문장이 너무 좋아서 몇번을 곱씹었다. 삐딱하게 사는 것, 삐딱함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도저히 참을 수 밖에 없는 예의범절 속에서 살고 있는 것 아닌가. 한 일간지에 연재하는 작가가 쓴 에세이에 "하고싶은 일을 하지 않고 사는 것도 자유"라고 얘기하는 글을 읽으며 큰 공감을 했다. 잘 산다는 건 하고 싶지 않은 일 안하며 남이사 삐딱하다한들 말든 의식 하지 않고 나답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봤다. 

Posted by 꼬장선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