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주군 언양읍 출신의 한국 대표 단편소설가

한국 최고 권위 문예지 <현대문학> 편집장 11년 맡아

서정적 리얼리즘 추구, 자연과 시골사람들에 대한 애정


            <오영수 문학관 모습. 1층에는 전시실, 2층에는 테라스와 난계홀, 도서실 등이 있다> 

소박한 시골 사람들과 이들을 품은 자연환경을 서정적이고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 소설가 오영수. 그는 영남알프스의 수려한 자연이 빚어낸 소설가가 아닐까? 고향, 그리고 자연이라는 소재는 언제나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 우리들 마음도 한장의 깨끗한 손수건이 되는 듯 하다.   

양산시 하북면과 접해 있는 울주군 언양읍은 난계 오영수의 고향이다. 요산 김정한의 처가도 양산시 화제리인데 난계 선생의 처가도 옛 양산시에 귀속됐던 기장군 일광면이었다고 하니 양산은 문인들의 처가로 유명한 곳인가 한다. 

언양읍 헌양길 280-12에 위치한 <오영수 문학관>은 지난 2014년 1월 21일 개관했다. 난계 선생의 묘소에 인접한 곳에 문학관을 건립했다. 울산광역시와 울주군이 자체 예산으로 건립했으며 운영도 민간위탁없이 관에서 직접 한다. 현재는 울산 대표 일간신문인 <울산매일>에서 기자로 근무했던 이연옥씨가 관장이다.

이 관장은 "울주군의 오영수 문학관에 오시면 이 일대의 다른 관광지도 함께 둘러보시면 좋다. 언양읍성 일부가 복원됐으며 오래된 언양초등학교 벽화도 아이들의 상상력을 볼 수 있다. 또 언양성당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다."고 말했다. 

오영수 문학관은 언양읍 시가지와 인접해 있어 방문하기 수월하다. 문학관 2층에는 여러 기증자들이 기탁한 단행본 서적들을 비치해 누구나 자유롭게 방문해 도서를 열람하도록 해 놓았다.  

문학관 초입에 들어서면 상수리나무 밑 벤치에 앉아 사색을 즐기고 있는 선생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벤치 위에는 책, 선생의 손에는 펜이 쥐어졌다. 한쪽 팔을 벤치 위로 올린 선생의 모습에서 사색인의 여유와 자유로움이 묻어나는 것 같다. 

            <상수리나무 아래 벤치에서 사색하는 오영수 선생 동상. 마치 살아있는 사람 같다>

난계는 '고향의 서정을 읊은 한국단편문학의 대표주자'로 감정적이고 촌스럽고 어리숙한 시골 사람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작품을 남겼다. 단편소설이 예술성을 더 잘 표현한다며 이를 고집한 선생은 생전에 200여편의 단편소설을 썼다. 오영수문학관은 선생의 작품을 5권의 포켓북으로 제작해 판매한다.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역사와 권위의 문예지인 <현대문학>을 전후의 혼란한 시기에 창간해 11년간 편집장 역할을 맡았다. 당시 발행인이 언양읍의 동향사람이었다고 한다. 1977년 고향마을이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옛 모습을 잃어버려 친인척이 있던 웅촌면 곡천리로 낙향했다. 낙향 3년째 자택에서 타계했다. 

아들은 서울대 조소과를 나온 한국의 유명한 예술가 오윤으로 그가 임종 직후 모습을 본뜬 데스마스크를 제작해 전시해 놓았다. 한 평생 문학의 이상을 고민했던 선생의 얼굴은 평안해 보였다. 근대적 도시문명이 초래하는 인간성의 피폐함을 고향의 정서를 통해 치유하려 했던 그의 한평생을 기려 후배 문인들은 그의 묘소에 추모비를 세웠다. 아름다웠던 한 영혼은 주옥같은 작품을 통해 우리들 마음속에 아로새겨졌다.

              

            <오영수문학관 정면에서 본 영남알프스, 이러한 수려한 자연이 그를 키워내지 않았을까?> 

Posted by 꼬장선비
,

<해부학자> (페데리코 안다라시) 문학동네

 

마테오 레알도 콜롬보, 클리토리스의 발견

중세시대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을 이해


중세시대를 들여다 보는 하나의 눈을 제공해준 책, 여성의 음부를 소재로 한 책으로 도발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 이 책은 에로틱한 소설이 아니다. 중세시대 해부학자 마테오 레알도 콜롬보가 비너스의 사랑이라고 이름붙인 클리토리스를 발견하는 과정이 묘사 돼 있다. 특히 당대 최고의 창녀 모나 소피아와의 만남을 그리면서 소설 전개에 호기심을 갖게 한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이 한낱 에로물이지 않은 이유는 이렇다. 르네상스로 불리는 인문주의가 의학부문에서 어떻게 꽃봉우리를 피우는가? 또 사법, 교육 등 모든 것들이 신으로부터 예속된 상황에서 여성들의 지위는 어떠하였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여성의 클리토리스를 발견하고 이를 발표하는 마테오 콜롬보는 피고인 석에서 재판을 받는다. 교회 권력은 이 발견이 여성 스스로 주체적이 되는 단초가 된다고 보고 이를 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마테오 콜롬보도 여성은 남자의 갈비뼈에서 만들어졌다는 성서의 내용을 부정하지 않는다면서 중세시대 여성에 대한 시각을 드러낸다. 가령 여자들은 자기 행동의 주인이 아니라 비너스의 사랑이 지닌 변덕의 노예라거나 여자는 비너스의 사랑의 지배를 받으며 여자의 모든 행위는 즉 가장 음탕한 창녀에서부터 충실하고 정결한 부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여자는 이 해부학적 기관의 영향을 받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그렇다.

마테오 레알도 콜롬보는 실존인물이다. 15세기 이탈리아 출신의 해부학자다. 여성의 클리토리스를 최초로 발견한 것으로 유명하다. 작가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수술의 역사>라는 책에서 소설 집필을 구상하게 됐다고 한다. 

오늘날, 여성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은 아직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유리천장은 있다. 여성들이 마녀라는 딱지를 때고 남자들의 단지 보조적인 존재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것은 인류의 크나큰 진보이다

Posted by 꼬장선비
,

셋이서 보낸 첫 휴가, 휴가인 듯 아닌 듯

천연기념물 굴참나무, 옛 휴게소 역할 했다

아버지의 휴가, 처자식을 위한 희생을 배우는 것


                    <망양휴게소 전망대에서 한 컷. 망망대해를 보며 나의 어리석음을 반성하다> 

올 여름 휴가는 지난 겨울에 태어난 아들과 함께 셋이서 보낸 첫 연휴였다. 3일부터 9일까지 일주일간의 휴가는 육아로 채워졌다. 휴가가 아닌 가사노동의 연장이었다. 육아도 노동이 아니던가? 우리 부부는 '육아특근'이라고 말하며 서로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육아엔 퇴근이란 없는가 보다. 

3일 오전에 출발해 울진 처갓집에 오후 무렵에 도착했다. 이날 아이는 외갓집에 적응한다고 울어댔다. 특히 외할아버지를 보고는 더 울어댔다. 외갓집에 간 외손주들은 대게가 울어댄다고 하니 씨(?)가 다른 것을 알기는 아는 모양이다.

잘 쉬는 것도 배워야 하는 시대다. 휴가가 되면 더 피곤하다는 이들은 제대로 쉬지 못한 탓이다.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을 쉬는 시간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진짜 휴식이란 내안의 또다른 나를 발견하는 일이 아닐까? 마이크로소프트의 창립자 빌 게이츠는 휴가가 되면 언제나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는다고 한다. 이를 통해 즐거움을 누린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찰나에 칭얼대는 아이를 어르면서 소중한 휴가는 가고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굴참나무가 300년이 넘는 세월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도 휴가 말미쯤에 계획했던 곳에 다녀왔다. 울진군 근남면 수산리의 천연기념물인 굴참나무를 본 것. 문화재청이 지정한 이 천년기념물 96호 굴참나무는 수령 약 330년이 넘었는데 옛날 이 지역의 이정표 역할을 했다. 인근의 불영사와 금강송 숲길로 가는 길목에 있는데 오늘날로 말할것 같으면 휴게소와 같은 역할이다. 이 마을 주민은 선비들이 굴참나무에 말을 매고 목을 축였다고 합니다. 나무 주변 일대가 주막이었던 것이죠. 굴참나무 열매는 도토리로 백성들의 주린 배를 채우는데 도움을 줬다고 하며 나무껍질은 굴피라 부르는데 지붕을 이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여러모로 쓰임이 많은 나무이다. 

<후포면 후포항구 왕돌초광장에 위치한 울진대게홍보전시관 전경. 1층은 울릉도행 여객터미널이다>  

울진군의 대표적인 항구인 후포리에는 울진대게(홍게)홍보전시관이 있다. 이 인근에 '거일리'라는 명칭도 대게의 이 지방 사투리인 '기'와 알을 합쳐부르는 '기알리'에서 '거일리'로 부르게 됐다. 그래서 거일리는 울진대게의 유래비가 서 있다. 이 마을 앞 바다에 왕돌초라는 커다란 바다속 암초는 대게가 서식하기에 최적인 장소다. 왕돌초에서 잡은 대게는 임금님 상에 오를 정도로 최고 품질이라고 한다. 근래에 잡히지 않던 울진왕게도 그물에 올라왔는데 바닷속 생태계가 복원되고 있다며 울진군은 대게홍보관에서 이를 알리고 있었다.

이렇게 휴가는 끝이 났다. 처부모님께서는 내려가는 딸 내외를 위해 각종 음식과 정성을 한 움큼 싸 주신다. 계획했던 봉화군과 영주시 부석사 여행은 끝내 하지 못했다. 아들과 아내에게 괜시리 짜증도 부려봤다. 부모님들께서도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 오셨고 지금도 그러해오고 있다. 처자식을 책망하려한 내 스스로가 부끄러워 졌다. 이렇게 휴가가 끝이났다.   

Posted by 꼬장선비
,

1932.1.26~ 양산 출생. 양산초 졸업, 1955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정치학과를 거쳐 1957년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5년 서울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58년~73년 서울대학교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를 지냈다. 1964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연경학회 객원교수를 지냈고 1971년 국제정치학회 회장, 1972년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소장. 1973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1973~83년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을 지냈다. 1981년~87년 학술원 회원(정치학 분야) 1985년~87년 서울대학교 총장, 1990년에서 1992년 통일원 정책평가위원장으로 있으며, 1991년에서 1992년 평화통일자문회의정책심의위원장, 민족통일연구원 이사장을 지내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장 목련장을 수상했다.

-출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사진은 2015년 10월 26일 <양산신문> 사옥에서 신정윤 기자가 촬영.

<교수신문> 2013년도 보도에 따르면 1980년 전두환 정권의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으로 활동한 경력이 낙인찍혀 학생들에게 친정부적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급기야 졸업식장에서 축사를 하는 박 총장 앞에서 학생들이 졸업식장을 빠져나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1987년 민주항쟁이 일어나던 해 임기 2년을 남기고 일신상의 이유로 서울대 총장직을 사임했다.

Posted by 꼬장선비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천연기념물 항목을 찾아보면 김해 한림면 신천리 이팝나무가 있다. 수령 650년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는 정확한 유래를 알수 없어 더욱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검게 그을린 노인의 피부 같은 나무 껍질, 수백년간의 비 바람을 견뎌왔을 나무 둥치는 신령스럽기까지 하다. 마을 주민들은 이 나무가 우물을 뒤덮고 있기 때문에 매년 용왕제를 지내 왔는데 요새는 우물이 아니라 나무 밑으로 개울이 흐르고 있다. 밑 둥치에서 갈라진 몇개의 나무 몸통은 제각각의 방향으로 휘거나 솟구치거나 고꾸라지거나 눕거나 다양하게 뻗어 있는데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 같은 것이 있다. 이렇게 자란 나무는 높이 30m에 육박하며 그 잎은 피고 지고를 수백번 반복해도 푸르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이팝나무는 전국 최고 수령인 것으로 추정되며 지주철을 받치고 있는데 마치 노인이 지팡이를 쥔 모습이다. 노거수도 꽃을 피운다. 오늘날 공장지역에 애워싸여 위태로워 보인다. 그러나 고작해야 100년을 넘게 사는 인간이 만든 문명이 650년의 세월에 비할바 아니다. 늙은 나무를 존경한다. 

 2016년 6월 11일 토요일에 아내와 아들과 함께...

Posted by 꼬장선비
,

<양산시 상북면 신전리에 위치한 천연기념물 234호 이팝나무에 꽃이 피어있다. 2016년 4월 촬영>

김해 신천리 이팝나무 수령 600여년으로 가장 길어

7그루 군락 전북 진안 평지리 이팝나무는 옛 아기무덤터 

양산 상북면 석계리 이팝나무 고사, 안타까운 일 


전국에 천연기념물로 등록된 이팝나무는 7그루다. 이 중 양산에만 2그루가 있었다. 양산시 상북면 신전리 이팝나무는 천연기념물 234호로 등록돼 있다. 석계리에도 천연기념물 186호 이팝나무가 있었지만 고사했다. 신전리 이팝나무는 수령 362년에 달한다.

이밖에도 전국에는 36호 순천 쌍암면 이팝나무, 183호 고창 중산리 이팝나무, 185호 김해 신천리 이팝나무, 235호 광양 류당공원 이팝나무, 214호 진안 평지리 이팝나무, 307호 김해 주촌면 이팝나무다. 

이 중 김해 신천리의 이팝나무가 고려때 심은 것으로 수령 약 600여년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전국의 천연기념물 이팝나무 중 가장 수령이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라북도 진안군에 위치한 이팝나무는 7그루가 군락을 이룬 곳으로 어린아이의 시체를 묻었던 곳으로 "아기사리"라고 지역에서 부르고 있다. 

이팝나무는 흰꽃이 나무를 덮을때 마치 흰쌀밥처럼 보인다고 해서 이팝나무라고 한다. 남쪽지방에 정원수나 풍치수로 심는데 목재는 건축 가구재로 쓰고 목부에서 염료를 추출한다. 식물 전체를 사제, 건위제로 사용하며, 꽃은 중풍치료에 쓰이기도 한다. 

     


Posted by 꼬장선비
,

<서울 종묘공원의 이상재 선생 동상>


"오늘날 허영이나 얻기 위해 공부하는 이가 많다" 일갈

100년전 글이지만 오늘날도 유효한 가르침

진정한 공부란 무엇인가 성찰, 선생의 청년 사랑 묻어나



오늘날의 청년들은 공부를 너무 오랫동안 하여서 병들고 있다. 헬조선, 이생포(이 생은 이미 포기했다) 등의 단어들이 청년들에게서 유행처럼 번저나가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 공부란 것도 인격수양을 바탕으로 하는 참공부가 아닌 경우가 많고 이 거짓공부를 30살이 넘도록 하니까 병이들수 밖에 없다. 강박증,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청년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약 100여년 전에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상재 선생의 글은 오늘날의 청년들이 읽어도 손색이 없다. 이상재 선생은 조정의 명을 받고 미국 워싱턴에 가게된다. 이 곳에서 모국의 자녀들에게 편지를 띄운다. 편지를 읽으면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공부란 어떤 의미인가하고 묻게된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공부는 좋은 직업을 갖고 이를 바탕으로 많은 임금을 받으며 더 많은 소비를 하며 살기 위한 경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돼 버렸다.

양산의 어느 학부모가 신도시의 학교를 맹목적으로 선호하고 심지어 '가촌'이라는 마을의 명칭을 없애달라고 요청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용렬함에 화가 치밀었다. 이는 수백년간 이어내려온 아름드리 나무가 있는 자연마을, 그 곳에 터를 잡고 살아왔던 마을공동체에 대한 무시이며 자연부락 원주민들을 업신여기는 것과 다름아니다. 이들의 치맛바람이 대한민국을 청소년 자살률 1위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내 자녀를 더 좋은 직업을 갖게 하기 위한 경쟁으로 내모는 과정에 다름아닌 것이다.

이상재 선생은 편지글에서 "입으로 외고 손으로 쓰는 것은 다 학습하는 것으로 어떤 것이나 학업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학습하는 까닭은 마음속에 간직하여 행동에 있어서 실행하는데 있는 것이다"라고 이상재 선생은 자녀들에게 가르쳤다. 배움은 실천이 바탕에 없으면 오히려 독이된다고 했다. "학업이란 것은 고금을 널리 통하여 내 마음을 넓히고, 내 의리를 밝히어 내 행동을 법도에 맞추어 행하고, 일을 당해서 시비를 옳게 분변하여 내 도리를 극진히 하는 것이니, 부귀와 영욕은 스스로 천명에 순종할지니, 너희는 마땅히 이 아비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지키고 행하여…"라고 했다. 공부는 인격수양의 과정인 것이다. 인격을 수양하면 부귀와 영화는 자연스럽게 따른다는 이 말씀이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크다.

안창호 선생은 <나의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라는 논설에서 "오늘날 진사 대과를 하기 위해 과거보러 다니는 관념으로 허영을 위하여 공부하는 이가 많습니다. 실사회에 나아가 직업을 감당하기 위하여 실지 학문을 배우려는 이가 적고, 아무 대학을 마치었다는 이름이나 얻기 위하여 법과 같은데에 들어가서 사각모자 쓴 사진이나 박아 보내는 것으로 성공으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한번 졸업한 후에 다시 더 학리를 연구하지 않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직업을 표준하지 않고 허영적 영웅을 표준하는 이가 많을 듯하외다"라고 했다. 대학 서열화와 모든 교육이 이를 가지기 위한 목적이 된 현실을 100년전의 글이 통찰하고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청년이 병들면 나라가 병든다고  했다. 3.15의거 4.19혁명, 5.18광주민주화 운동 모두 청년들이 중심이 됐다. 이 시절 청년들은 패기라도 있었다. 오늘날 청년들이 뜻을 세우고 미래를 열기를 바란다.

Posted by 꼬장선비
,

 

 

 

 

<신일우씨가 기자회견을 하고있다>

지난달 25일 한 건의 기사가 더불어민주당 양산시지역위원회를 당황케 했다. 경남 진주에 본사를 둔 <경남도민신문>이 `양산갑 송인배 후보 시의원 결의서 논란`이란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지난 30일자로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경남도민신문>은 정정보도를 냈다. 

하지만 지난 4일 열린우리당 창당 당시 양산시 위원장을 역임했다는 신일우씨가 기자회견을 했다. 신씨는 기자회견에서 <경남도민신문>의 사실이 아닌 보도 내용을 기자들에게 옮겨 설명했다. 신씨는 기자회견장에 논란이 된 '사퇴결의서'라는 제목의 서류도 공개했으며 서류에는 상무위원들의 날인까지 돼 있었다. 이 서류에 대해 이윤구 더불어민주당 양산시지역위원회 사무국장은 "유출 경위는 말하지 않겠다. 우리끼리 결의하는 차원에서 했다"고 말했다.
기자회견 이후 더불어민주당 양산지역위원회는 신일우씨를 공직선거법의 허위사실 유포와 후보자 비방죄로 고발했다.

이밖에도 신 씨는 송인배 후보가 다섯번째 출마하면서 야당의 공천을 독차지하고 탈당과 복당을 임의로 하는데는 친노패권주의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으며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전두환 정권의 실세가 당대표인 더불어민주당을 어찌 수권정당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또 더불어민주당은 국리민복을 위해 노력하고 분투하는 정당이 아니라서 송인배 후보 낙선 운동을 한다고 밝혔다.

이날 기자회견은 국내 지역 일간지와 주간지에 보도돼지 않았다. 신씨는 이에대해 "허위사실인지 아닌지는 법원이 판단할 것이다. 기자들이 패기가 없다. 나는 감방에 가도 좋다. 이런 야당의 구태를 드러내야 양산 청년들과 후배들의 미래가 있다"고 말했다.

신씨는 지난 1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김해 봉하마을에 노전대통령 묘역을 참배했을 당시 중앙일보 현장 취재기자에게 "열린우리당 창당 때부터 노 대통령을 지지했지만 현재 친노 세력은 정권교체의 의지가 안 보여 대안은 안철수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하는 등 국민의당을 지지하고 있다.

 

 

 

Posted by 꼬장선비
,

양산신문이 주최한 20대 총선 후보자 정책발표회가 2016년 4월 2일 양산 갑, 양산을 두개 선거구에서 오전 오후로 나눠 진행됐다. 오후 3시부터 웅상종합사회복지관 강당에서 열린 양산을구 발표회는 긴장감이 오가는 가운데 진행됐다. 후보자간에 인사를 건내면서 무소속 박인 후보가 새누리당 이장권 후보의 악수를 거절했다. 이장권 후보는 후보자 단상에 앉기 전 재차 악수를 건냈지만 박인 후보는 거절했다. 박 후보는 "니가 내한테 그러는데 어떻게 악수를 하겠노"라며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또 더불어민주당 서형수 후보측의 한 관계자가 양산신문의 추첨 방식 정책발표회의 공정성에 이의를 제기해 잠시 소란이 일기도 했다. 양산신문 사주 이정걸 이사장은 단상에서 후보자들의 의견을 물어 소란을 진정시켰다. 정책발표회는 애초 후보자 본인이 본인의 문제를 추첨하는 방식을 변경해 상대 후보자의 문제를 추첨하는 방식으로 정책발표회를 진행했다. 양산신문은 2016년 4월 5일자 1218호 8면을 할애해 이를 보도해 유권자에게 후보자를 선택하는 나침반을 제공했다.

 

 

Posted by 꼬장선비
,

직업 윤리에 대해 생각한다. 윤리는 대체 왜 필요한가? 그것도 직업에 말이다. 먹고살기가 모든 가치를 압도할때, 그리고 이에 대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때 천박한 자본주의가 창궐한다. 우리는 이를 저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자니까.
대체 왜 일하는가? 돈 벌기 위해 일을 한다고 답한다면 이는 절반만 옳은 대답이다. 우리는 가치를 생각해야 한다. 윤리는 거기에서 나온다. 지역신문 기자는 존재 자체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안 했지만 이는 비겁한 일이다. 기자는 월급쟁이 이기에 회사가 생산하는 상품인 신문을 팔수 있는 매력적인 기사를 생산해야 하며 공익적인 목격자의 역할도 해야 한다. 우리는 시민을 대신해 묻고 따지는 권한을 부여 받았다. 그 기본을 하지 못하면 직업 윤리를 지키지 못한 것이다.
언론에게 부여된 기본 기능이 사실 보도인데 시민의 눈과 귀를 가리는 언론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기사와 광고는 항상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좋은 기사는 기본적으로 저항적일 수 밖에 없다. 제 기능을 못하는 언론사는 비유컨데 완장을 찬 깡패와 같다. 사회의 공기가 흉기가 됐을때 폐간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서 옳은 일이다. 시민의 눈과 귀가 되기는 커녕 눈과 귀를 가리는 언론은 오히려 사회에 해악을 끼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적이지 못하다. 이런 언론사에서 일하는 기자는 당연히 스스로 당당하지 못하게 된다. 언론이 가진 숭고한 사명감을 다하도록 사주를 설득하고 견제 했어야 하나 이를 다하지 못한 나에게도 책임이 크다. 갑질을 하지 않는 기자의 광고 영업은 괜찮다고 여기고 이에대해 저항조차 하지 않았던 나는 기자가 아닌 월급쟁이에 불과했다. 부끄럽다. 더이상 가족 부양과 먹고사는 문제를 핑계로 직업인의 양심을 파먹는 일은 하지 않겠다.
Posted by 꼬장선비
,